이 글은 2013. 9. 2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주관한 안양문화예술 이야기마당 '소담'의 <지역 예술가의 작업 소개> 프로그램의 발표내용이다.

안양문화재단 주최 ‘소담’
설치미술가 이영희의 작업노트

안녕하세요?
설치작업을 하고 있는 이영희입니다.
우선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안양문화재단 관계자님들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 있는 자리에서 함께 이야기 나눌 기회가 되어 기쁩니다.

저는 평촌아트홀이 생기기 전 오랫동안 근처 샘마을에서 살아오며, 이 아트홀이 조성되는 것을 많은 기대감과 자부심-집근처에 바로 문화단지가 생기는 구나-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이후로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한 이곳은 저의 저녁산책 코스가 되었습니다.
사실 ‘소담’이 진행되는 ‘아트림’, 이 공간이 이렇게 매력적이고 효율적인 곳이 되기 이전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맥주를 파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이곳은 널찍한 공원을 여유롭게 산책하며 남편과 함께 꼭 들러야만 했던 필수 코스 중 하나였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3-4년 정도(?) 계속 문이 닫힌 채 방치된 듯하였어요.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워, 재단에 문의도 많이 했었답니다. 파산한 개인이 물건을 그대로 놓고 자취를 감추어버려, 우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하더군요. 긴 시간, 이 좋은 공간을 묵혀두는 것이 내심 많이 아쉬었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어 이렇게 멋진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 곳에 지금 있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늘 활기차게 운영되는 이 공간이 시민의 한사람으로서는 아주 자랑스럽고, 든든합니다.
무엇보다 자율 커피점 운영은 지역주민의 수준을 믿고 지원해주는 편안한 쉼터라는 신뢰감이 들어 무엇보다 자부심이 생기고, 수시로 애용하는 장소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사실 이곳 평촌아트홀은 제게는 다른 의미에서 또한 뜻깊은 공간이기도 합니다.평촌아트색소폰앙상블 단원으로 이곳에 7년째 다니고 있으니까요. 지난 토요일에는 앙상블 5번째 공연을 이곳 아트홀에서 하였답니다.

말머리가 길었습니다.

이제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제 작업을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틈’이라는 주제로 오랫동안 작업해 왔습니다. 참고로 저는 명학역 근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비빌 틈이 없다, 틈바구니에서 아등바등하다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틈새로 빠져나가다. 틈새로 스미다라는 말도 있고, 그 틈에 살짝 끼어드니? 라는 말도 있고...
생각해 보면 ‘틈’이라는 말 안에는 다양한 상충된 의미들이 복합적으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이 이러저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 틈의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틈 Carck : 생명 Life, 2005 (detail)

‘틈’을 얘기하다보니 최근에 보았던 영화 한편이 생각납니다. 야론 질버만 감독의 <마지막 4중주>입니다. 혹 보신 분 계신가요?
야론 질버만 감독은 좀 낯설은 이름이지만 전설적인 유태인 수영팀을 다룬 다큐 <워터마크>로 프랑스 영화제 등에서 관객상을 석권했는데 <마지막4중주>는 극영화 데뷔작이라고 하더군요. 감독의 이력이 좀 독특해요. MIT 출신에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업을 했다는군요.
그는 실내악 메니아인데 이 영화의 각본도 직접 썼다고 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인생의 ‘틈’과 그 ‘틈’ 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잠깐 홍보물에서 발췌한 줄거리를 소개드릴까요?
결성 25주년 기념공연을 앞둔 현악4중주단 “푸가”가 있습니다. 그 중 음악적,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하던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스씨병 초기진단을 받으면서 네 명의 단원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지요. 스승과 제자, 부부, 옛 연인, 친구 등 개인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관계인 이 네 사람은 이를 계기로 25년간 숨기고, 억눌러온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삶과 음악에서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한편 본인의 병으로 인해 푸가 4중주단이 위태로워 진 것을 깊이 염려하던 피터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될 25주년 기념공연에서 난이도 높기로 유명한 베토벤의 현악4중주 14를 연주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쯤에서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을 짚어야 될 것 같군요. 이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이니까요. 베토벤이 귀가 멀고, 말년에 작곡한 이곡은 자신의 현악 4중주 중 최고로 꼽았다하지요. 7악장이 내리 계속되는 음악으로 중간에 휴식이나 조율이 허락되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틈이 없이 계속되는 음악인 것이지요. 그래서 연주하는 동안 악기의 음이 어긋나기도 하고, 하모니가 엉클어지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연주를 계속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원래 그렇게 하도록 된 음악이니까요.

드디어 푸가 4중주단의 마지막 연주회가 열리는데..
인상적인 장면하나.
연주 중 첼리스트 피터는 갑자기 연주를 멈춥니다. 공연장에 적막이 흐르고, 단원들은 모두 피터를 쳐다봅니다. 피터가 이야기하지요.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을 겁니다.

“저는 여기에서 멈추어야겠습니다. 저는 빠르게 연주되는 이 부분을 함께 연주하기에는 제게 닥친 병으로 인해 너무도 벅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베토벤의 14번을 끊임없이 이어서 연주해야 하지만 저를 이어 새롭게 연주해 줄 새로운 연주자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연주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다시 피터가 이야기하지요. 이 장면에서의 이야기가 상당히 은유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이 곡은 금방 제가 마친 곳 다음부터 연주되어야 하겠지만, 이 곡의 감정과 느낌을 살려 이어서 바로 시작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양해를 해주신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연주되었던 앞쪽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되돌아간 지점에서 다시 이 곡의 느낌과 감정을 다잡아 시작되어야 합니다.”

연주는 되돌아간 부분부터 새로운 느낌으로 새 연주자와 함께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되돌아가기”

저는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한 메타포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주의 템포와 감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되돌아보는 것, 그리고 그 틈 사이 다시 시작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꾸준히 이어온 우리 삶의 역사가 아닐까요?

영화의 첫 장면에서는 인상적이게도 시인 'T.S 엘리엇'의 ' Four Quartets'(4개의 사중주) 라는 시가 나옵니다. 현재와 과거의 시간은 아마도 미래의 시간 속에도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다. 끝과 시작이 늘 그곳에 있고, 시작의 이전과 끝의 이후엔 늘 현재가 있다. 베토벤 현악 4중주를 듣고 시인 T.S. Eliot(엘리엇)이 써 내려간 시라고 합니다.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파편들이 마디마디 잘린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이어져 있다는 것이겠지요.

저의 작업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 작업 초기 발굴과 유물의 파편들이 저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아주 오래된 역사의 흔적, 파편들을 모으는 일.
삶의 흔적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 그러한 관심은 어쩌면 삶에 대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태도가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파편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지고, 어느 부분들은 없어지기도 하였겠지만. 우리는 그러한 파편을 되돌아 찾고, 떨어져 나간 곳을 다른 층위의 파편들로 덧대어보기도 하고, 없어진 부분을 또 다른 비슷한 모양의 파편으로 다시 채워 넣어보려 애쓰기도 하면서...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 가며 삶을 꾸려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왔습니다.

최소한 저에게 있어 작업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 파편들의 틈사이 사이에는 삶의 싹들이 또한 어느 순간 비집고 올라오겠지요.
엘리엇의 시처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파편들이 서로 얽히고 이어진 틈 사이에 켜켜히 쌓인 시간의 무게를 들어 올리며 생명의 싹이 자라날 거라는 믿음을, 그러한 생명의 틈, 삶의 틈을 믿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또한 시간의 층위를 안고 있는 거대한 대지, 이 또한 면면히 내려오는 인간의 몸에 대한 메타포가 될 것인데... 각자가 밟고 있는 발아래 대지 또한 각자가 경험하는 삶의 파편들을 잇고, 그 틈 사이에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순간 삐죽이 내민 싹은 대지 아래 건강한 뿌리를 보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다지게 합니다. 건강한 뿌리를 달고 날아오르는 대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힘내어 틈틈이 작업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자신이 멈추어야 하는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때도 있겠지요?
이 영화 속의 피터처럼 말이지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영원할 수는 없으니까요. 또다른 삶의 파편으로 떨어져 나가게 되는 순간들이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요?
이러한 파편들의 틈과 틈 사이, 피터처럼 일단 조용히 멈추고 저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이전의 악보로 다시 돌아가서, 거기에서부터 다시 연주를 시작할거라고 말이지요. 그리하여 거기에 새로운 파편들을 덧대는 그 틈 사이, 속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생명의 움직임들은 어느 순간, 틈 사이의 싹을 통해 삶의 모습을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삶의 파편과 파편을 잇는 대지들은 건강한 뿌리를 달고 날아오르며, 그 웅장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마음으로 다져봅니다.


이 글은 2013. 9. 2 안양문화예술재단이 주관한 안양문화예술 이야기마당 '소담'의 <지역 예술가의 작업 소개> 프로그램의 발표내용이다.

안양문화재단 주최 ‘소담’
설치미술가 이영희의 작업노트

안녕하세요?
설치작업을 하고 있는 이영희입니다.
우선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안양문화재단 관계자님들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 있는 자리에서 함께 이야기 나눌 기회가 되어 기쁩니다.

저는 평촌아트홀이 생기기 전 오랫동안 근처 샘마을에서 살아오며, 이 아트홀이 조성되는 것을 많은 기대감과 자부심-집근처에 바로 문화단지가 생기는 구나-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이후로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한 이곳은 저의 저녁산책 코스가 되었습니다.
사실 ‘소담’이 진행되는 ‘아트림’, 이 공간이 이렇게 매력적이고 효율적인 곳이 되기 이전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맥주를 파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이곳은 널찍한 공원을 여유롭게 산책하며 남편과 함께 꼭 들러야만 했던 필수 코스 중 하나였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3-4년 정도(?) 계속 문이 닫힌 채 방치된 듯하였어요.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워, 재단에 문의도 많이 했었답니다. 파산한 개인이 물건을 그대로 놓고 자취를 감추어버려, 우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하더군요. 긴 시간, 이 좋은 공간을 묵혀두는 것이 내심 많이 아쉬었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어 이렇게 멋진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 곳에 지금 있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늘 활기차게 운영되는 이 공간이 시민의 한사람으로서는 아주 자랑스럽고, 든든합니다.
무엇보다 자율 커피점 운영은 지역주민의 수준을 믿고 지원해주는 편안한 쉼터라는 신뢰감이 들어 무엇보다 자부심이 생기고, 수시로 애용하는 장소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사실 이곳 평촌아트홀은 제게는 다른 의미에서 또한 뜻깊은 공간이기도 합니다.평촌아트색소폰앙상블 단원으로 이곳에 7년째 다니고 있으니까요. 지난 토요일에는 앙상블 5번째 공연을 이곳 아트홀에서 하였답니다.

말머리가 길었습니다.

이제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제 작업을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틈’이라는 주제로 오랫동안 작업해 왔습니다. 참고로 저는 명학역 근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비빌 틈이 없다, 틈바구니에서 아등바등하다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틈새로 빠져나가다. 틈새로 스미다라는 말도 있고, 그 틈에 살짝 끼어드니? 라는 말도 있고...
생각해 보면 ‘틈’이라는 말 안에는 다양한 상충된 의미들이 복합적으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이 이러저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 틈의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틈 Carck : 생명 Life, 2005 (detail)

‘틈’을 얘기하다보니 최근에 보았던 영화 한편이 생각납니다. 야론 질버만 감독의 <마지막 4중주>입니다. 혹 보신 분 계신가요?
야론 질버만 감독은 좀 낯설은 이름이지만 전설적인 유태인 수영팀을 다룬 다큐 <워터마크>로 프랑스 영화제 등에서 관객상을 석권했는데 <마지막4중주>는 극영화 데뷔작이라고 하더군요. 감독의 이력이 좀 독특해요. MIT 출신에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업을 했다는군요.
그는 실내악 메니아인데 이 영화의 각본도 직접 썼다고 합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인생의 ‘틈’과 그 ‘틈’ 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잠깐 홍보물에서 발췌한 줄거리를 소개드릴까요?
결성 25주년 기념공연을 앞둔 현악4중주단 “푸가”가 있습니다. 그 중 음악적,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하던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스씨병 초기진단을 받으면서 네 명의 단원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지요. 스승과 제자, 부부, 옛 연인, 친구 등 개인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관계인 이 네 사람은 이를 계기로 25년간 숨기고, 억눌러온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삶과 음악에서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한편 본인의 병으로 인해 푸가 4중주단이 위태로워 진 것을 깊이 염려하던 피터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될 25주년 기념공연에서 난이도 높기로 유명한 베토벤의 현악4중주 14를 연주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쯤에서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을 짚어야 될 것 같군요. 이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이니까요. 베토벤이 귀가 멀고, 말년에 작곡한 이곡은 자신의 현악 4중주 중 최고로 꼽았다하지요. 7악장이 내리 계속되는 음악으로 중간에 휴식이나 조율이 허락되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틈이 없이 계속되는 음악인 것이지요. 그래서 연주하는 동안 악기의 음이 어긋나기도 하고, 하모니가 엉클어지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연주를 계속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원래 그렇게 하도록 된 음악이니까요.

드디어 푸가 4중주단의 마지막 연주회가 열리는데..
인상적인 장면하나.
연주 중 첼리스트 피터는 갑자기 연주를 멈춥니다. 공연장에 적막이 흐르고, 단원들은 모두 피터를 쳐다봅니다. 피터가 이야기하지요.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을 겁니다.

“저는 여기에서 멈추어야겠습니다. 저는 빠르게 연주되는 이 부분을 함께 연주하기에는 제게 닥친 병으로 인해 너무도 벅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베토벤의 14번을 끊임없이 이어서 연주해야 하지만 저를 이어 새롭게 연주해 줄 새로운 연주자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연주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다시 피터가 이야기하지요. 이 장면에서의 이야기가 상당히 은유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이 곡은 금방 제가 마친 곳 다음부터 연주되어야 하겠지만, 이 곡의 감정과 느낌을 살려 이어서 바로 시작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양해를 해주신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연주되었던 앞쪽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되돌아간 지점에서 다시 이 곡의 느낌과 감정을 다잡아 시작되어야 합니다.”

연주는 되돌아간 부분부터 새로운 느낌으로 새 연주자와 함께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되돌아가기”

저는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한 메타포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주의 템포와 감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되돌아보는 것, 그리고 그 틈 사이 다시 시작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꾸준히 이어온 우리 삶의 역사가 아닐까요?

영화의 첫 장면에서는 인상적이게도 시인 'T.S 엘리엇'의 ' Four Quartets'(4개의 사중주) 라는 시가 나옵니다. 현재와 과거의 시간은 아마도 미래의 시간 속에도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다. 끝과 시작이 늘 그곳에 있고, 시작의 이전과 끝의 이후엔 늘 현재가 있다. 베토벤 현악 4중주를 듣고 시인 T.S. Eliot(엘리엇)이 써 내려간 시라고 합니다.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파편들이 마디마디 잘린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이어져 있다는 것이겠지요.

저의 작업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 작업 초기 발굴과 유물의 파편들이 저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아주 오래된 역사의 흔적, 파편들을 모으는 일.
삶의 흔적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 그러한 관심은 어쩌면 삶에 대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태도가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파편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지고, 어느 부분들은 없어지기도 하였겠지만. 우리는 그러한 파편을 되돌아 찾고, 떨어져 나간 곳을 다른 층위의 파편들로 덧대어보기도 하고, 없어진 부분을 또 다른 비슷한 모양의 파편으로 다시 채워 넣어보려 애쓰기도 하면서...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 가며 삶을 꾸려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왔습니다.

최소한 저에게 있어 작업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 파편들의 틈사이 사이에는 삶의 싹들이 또한 어느 순간 비집고 올라오겠지요.
엘리엇의 시처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파편들이 서로 얽히고 이어진 틈 사이에 켜켜히 쌓인 시간의 무게를 들어 올리며 생명의 싹이 자라날 거라는 믿음을, 그러한 생명의 틈, 삶의 틈을 믿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또한 시간의 층위를 안고 있는 거대한 대지, 이 또한 면면히 내려오는 인간의 몸에 대한 메타포가 될 것인데... 각자가 밟고 있는 발아래 대지 또한 각자가 경험하는 삶의 파편들을 잇고, 그 틈 사이에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순간 삐죽이 내민 싹은 대지 아래 건강한 뿌리를 보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다지게 합니다. 건강한 뿌리를 달고 날아오르는 대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힘내어 틈틈이 작업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자신이 멈추어야 하는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때도 있겠지요?
이 영화 속의 피터처럼 말이지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영원할 수는 없으니까요. 또다른 삶의 파편으로 떨어져 나가게 되는 순간들이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요?
이러한 파편들의 틈과 틈 사이, 피터처럼 일단 조용히 멈추고 저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이전의 악보로 다시 돌아가서, 거기에서부터 다시 연주를 시작할거라고 말이지요. 그리하여 거기에 새로운 파편들을 덧대는 그 틈 사이, 속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생명의 움직임들은 어느 순간, 틈 사이의 싹을 통해 삶의 모습을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삶의 파편과 파편을 잇는 대지들은 건강한 뿌리를 달고 날아오르며, 그 웅장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마음으로 다져봅니다.